소프트한 우리의 도시를 바라며
- 고려대학교 건축과 남정민 교수
오늘날 한국 인구의 약 92%가 도시에 살고 있다. 도시로 인구가 몰리는 이런 추세는 비단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보편적 현상으로, 한국처럼 인구가 줄어드는 나라에서 조차, 도시의 거주비율은 앞으로도 좀처럼 줄지 않을 것이다. “소프트 시티”의 본문에서도 언급한 “우리가 건물을 만들면, 건물이 다시 우리를 만든다.”는 윈스턴 처칠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만드는 도시는 다시 우리 삶을 만든다. 전체 국민의 90%이상에게 삶의 무대이자 터전이 도시인 상황에서, 우리가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보다 나은 도시를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도시는 그리고 그 중에서도 한국의 대표적인 도시인 서울은 과연 살기 좋은 도시인가? 서울처럼 24시간 주7일 내내 각종 상점과 편의시설을 편하게 사용할 수 있고, 늦은 밤에도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도시는 많지 않다. 여기에 서울이 가진 다양한 콘텐츠와 교통-통신 등의 인프라를 더하면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은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서울이 우리의 삶을 좋게 만드는 것들은 대부분이 서울이 가진 내용물(소프트웨어)의 가치와 편리함에 기인한 것이 크다. 이것을 담고 있는 물리적 환경(하드웨어)으로 그 질문을 확장하자면, 서울이 살기 좋은 도시냐는 질문에 “예스”라고만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서울이 가진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서울의 이곳저곳에 다양한 종류의 흥미로운 장소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 전체로 봤을 때 물리적 환경으로서 좋은 도시인지에는 여러모로 의문이 생긴다. 그것이 무엇일까?
서울에는 가고 싶은 장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그런 장소들은 서울이라는 대도시 안에 서로 단절된 섬처럼 놓여있다. 거리로 나가면 차량이 사람보다 우선하고, 가로변에 유모차나 자전거를 끌고 나가는 것은 전쟁터와 같다. 도로변의 상점들은 그 안에서는 쾌적하지만 거리에서는 경쟁만 가득한 도시 풍경을 만들어낸다. 길거리에 마음 편하게 앉아서 자연을 바라보며 쉴 수 있는 공터나 벤치는 발견하기 힘들고, 공원을 가려면 지하철을 타거나 차로 이동을 해야 한다. 서울 인구의 약 70%가 거주하는 고층 아파트의 군락이 서울의 가장 인상적인 도시적 랜드마크를 형성하고, 이 아파트들의 단지는 다양한 편의시설, 안전한 보행자거리와 조경 등, 거주자에게 편리하고 좋은 시설들을 제공하여 누구나 살고 싶어하지만,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를 형성하여, 하나의 아파트 단지는 하나의 닫힌 섬을 형성하며 길과 이웃과 단절되어 있다. 단지가 큰 아파트일수록 도시 가로변의 공공에게는 불편한 큰 공백을 만든다.
서울이 가진 다양한 가치와 장점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환경에서 생기는 아쉬움은 결국 거리와 건물의 소통이 없고, 쾌적하게 쉬고 거닐 수 있는 공공의 영역이 적고, 좋은 공간들이 거리로 연결되지 못하여 도시의 공공 영역과 단절되어 섬처럼 그 안에서만 존재하는데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도시에 거주하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가로와 공공의 영역에서 우리의 삶의 질을 높여주고 쉬고 즐길 수 있는 장소가 부족하다. 이런 도시환경의 부족함이 PC방, 찜질방, 카페, 식당 등 다양한 “방” 혹은 실내 문화를 만들어냈다. 서울의 가로변과 골목을 채우고 있는 다양한 상점들과 카페는, 서울의 도시환경이 제공하지 못하는 공공환경과 삶의 질의 부재를 채우기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는 서울뿐 아니라 급속한 산업화를 겪으며 숫자(세대수, 거주면적, 임대면적, 땅값, 차량수 등)로 만들어졌던 많은 한국의 도시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현상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도시도 삶의 질을 높이는 환경을 제공할 수 있을까? 앞으로 우리 도시를 보다 나은 환경으로 가꾸기 위한 방향은 무엇일까? “소프트 시티”는 도시에 사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도시를 되돌아보고, 도시가 가진 가치를 숫자가 아닌 순수한 물리적 환경의 관점에서 재인식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책을 통해서 도시가 가진 물리적 환경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다. 국내에서 재개발, 도시재생 등의 키워드로 도시를 발전시키고자 했지만, 결국은 숫자와 정책적 대안(소프트웨어)에 주로 머물러 있었고 도시를 만드는 물리적인 환경(하드웨어)을 구축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해왔다.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도시를 구성하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모두 중요하다. 그럼에도, 그동안 우리의 도시계획이 주로 소프트웨어적인 해답에 머물러 있었다면, 소프트 시티는 하드웨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다.
물리적 환경의 측면에서, 어떻게 도시를 읽고 만들어야 하는지, 어떻게 건물과 도시의 관계를 지어야 하는지, 어떻게 건물과 자연의 관계를 지어야 하는지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은 가뭄의 단비와 같은 책이다. 책에서 다루는 건축-도시 디자인 접근방식이 덴마크 및 유럽의 방법과 사례에 기반을 하였음에도, “소프트 시티”는 “사람”이라는 보편적 요소, 그리고 “사람의 삶”, “도시”, “자연”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기반을 두고 그 건축적 해법을 풀어나가고 있어 국경과 지역을 넘어서는 보편적 가치를 갖는다. 또한, 섬세한 관찰과 풍부한 건축적 경험과 연구에 기반한 본문의 세부적이고 다양한 도시적 디자인요소에 대한 내용들은 우리가 앞으로 한국의 도시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에 대한 방법론의 훌륭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도시들은 앞으로도 변해가고 성장해 갈 것이다. 그 동안은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숫자로서 소프트웨어적으로만 도시를 계획해 왔다면, 앞으로는 거기에 사는 사람들과 사람들의 삶의 질을 어떻게 물리적 환경으로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소프트 시티는 실질적인 설계와 계획을 아우르는 실천적인 디자인 방법론을 통해 그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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